아트스페이스 호화의 신년 기획전 《PARAXIS》는 각자의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한 실제적 대상(인물, 풍경)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환상적 화면으로 구축하는 4인의 작업을 조명한다. 이들이 표현한 경계적 회화는 현존하지 않는 이세계(異世界)의 것을 구현하지도, 눈 앞의 대상을 온전히 재현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나 그 곳에서 튕겨져 나온, 혹은 가리워진 존재들을 각각의 화법으로 불러낸다. 그리하여 그 존재들은 매혹적인 화면으로 전개되어 억압된 욕망과 기억을 가시화하며 세계의 이면을 들춰낸다. 《PARAXIS》는 현실과 환상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중간지대의 형상들을 그린 김혜리, 이재헌, 하지훈, 홍성준의 작업을 한 데 전시하며, 이들이 표현한 환상적 이미지들이 어떻게 세계와 전유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혜리는 이발소 그림이나 풍수 미술품, 선물 등에 이용되는 상업미술 이미지를 채집하고 뒤섞어서 재구성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리만족감을 주는 한편, 기존에 향유되던 고전 미술을 대중화한 장르라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상실을 수반하기도 한다. 잘 그린 제도권과 비제도권 그림들은 기존의 맥락에서 오려짐과 동시에 엉뚱한 맥락에 얹혀져 익숙함과 기이함을 자아내며, 김혜리의 그림을 주시하게 만든다. 작가는 하위호환된 이상적 미술 이미지를 새로운 문맥의 모방과 재현으로 조형화함으로써 동시대의 욕망에 대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이재헌은 그리고 다시 지우는 붓질로 선명함과 흐릿함을 오가며, 실체가 불분명한 익명의 인간과 시계열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공간을 그린다. 인물의 얼굴은 뿌옇고 얇게 표현한 반면, 꽃으로 읽히는 도상들은 매우 되직한 질감으로 선명하게 그려 현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체계에 괴리를 발생시킨다. 작가는 이렇게 상반된 묘법과 질감의 충돌에서 비롯된 모호한 구상 회화를 통해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상충하는 욕망들을 가시화하며, 언어로 대체불가능한 독자적인 그림의 세계를 묵묵히 천착한다.
하지훈은 물감을 소조하듯 켜켜이 쌓아 올려 어렴풋한 기억 속 풍경을 신비로운 괴석의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유년시절부터 빈번한 이주로 인해 여러 도시를 경험했으며, 풍경은 그에게 영원하면서도 변화무쌍한 테마였다. 그는 과거 풍경에 대한 느낌을 총체적으로 축조하기 위해 색과 위치를 고심하여 지정한 뒤 붓, 혹은 도구없이 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짙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듯한 하지훈의 초현실적 덩어리들은 과거 풍경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공감각적 인상을 하나의 상으로 응축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홍성준은 그리는 행위와 재료의 물성, 그리고 재현이라는 전통적 방법론을 변주하여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는 주로 직접 찍은 풍경 이미지를 낱장의 층위로 분절하여 그것들을 또 다른 색면 레이어와 포개듯이 그려낸다. 정교하게 세공된 재현의 영역과 그것을 상쇄하는 색면의 층위는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며 실재와 환영을 동시에 소환한다. 작가는 스스로의 작업에 주석을 붙이지 않고 회화 매체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동력삼아 지침없이 전진한다.
전시명 ‘PARAXIS(점근축)’는 광학용어로 렌즈와 대상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공간을 뜻한다. 렌즈의 정중앙을 통과하는 한 줄기의 빛 이외에 그 곁을 근소한 차이로 비껴가는 수많은 빛들이 번지는 곳이 바로 이 공간이다. 이곳에선 실재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발생하지만, 엄연히 현실의 존재와는 다르다. 즉, 실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실재와는 다른 모호한 장소인 것이다. 환상 문학 연구가인 로지 잭슨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나 현실과 괴리된 점근축의 이러한 경계적 상태를 ‘환상이 출몰하는 장소’ 로 비유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 곳에서는 은폐되어진 것들이 폭로되고, 현실과의 충돌로 인해 낯설고 이질적인 감흥을 유발하여 기존의 규율을 뒤집고 시각을 개방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 또한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그리고 외부와 내부 세계를 부유하며 불분명한 위치에 놓여있는 형상을 그려 나간다. 전시 《PARAXIS》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침투하여 ‘숨겨진 세계’ 를 지금 이곳에 불러내고자 하며, 이를 통해 낡은 실존에서 탈출해 세계에 대한 신선한 자각을 선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