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벽의 고백
- 전시기간 23.03.18 - 23.04.09
- 전시장소 Artspace Hohwa
- 전시작가 기획 : 이경미 (프로젝트비아비) 작가 : 신창용, 조영주 그리고 박관우, 이연숙, 신선주
H아트랩 2기 전시 Part 2.
하얀 벽의 고백 (Voices from the Walls)
<하얀 벽의 고백>은 인식 속에 존재하는 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쉬이 '나(우리)'와 '타인(그들)'을 구분 짓고 자신의 취약성을 그들에게 투영하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잠재우려 합니다.
그리하여 벽 너머의 '그들'은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소비되거나 자본주의 산업 체계 안에서 일종의 노동력으로 치부되는 등 얄팍한 존재가 됩니다.
본 전시에서는 벽 너머의 존재들인 엄마, 이주민, 히어로를 소환합니다. 작품 속에서 이들은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과 쓰임의 틈새에서 미끄러지거나 자기식대로 전유한 주체들입니다.
회화, 퍼포먼스 영상 및 사운드, 설치 작품과 연구 자료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되는 전시는 대상화했던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의 취약성을 위로하는 몸짓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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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이경미 (독립 기획자)
벽은 힘이 아니라 두려움의 상징이다.
벽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 확신이 없음을 보여준다.
- 마사 누스바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 2016)
여기, 벽이 서있다. 수용소의 거대한 담장에서부터 쇼핑몰을 구획하는 단지, 지하철 플랫폼, 일터의 파티션, 화장실 칸, 개인의 방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공간을 분리하고 가치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기 보존을 위해 벽들을 계속 세운다. 물리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인식 속에서도 말이다. 이 벽들은 나(우리)와 타인(그들)을 구분 짓고 자신의 취약성을 벽 너머로 밀어버리는 수단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와의 연결 지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밀어낸 그들은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소비되기도 하고 자본주의 산업 체계 안에서 일종의 노동력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나’와는 달라서 참 다행이다! 벽들은 이렇게 두려움을 내려놓고 안심하도록 만든다.
전시 <하얀 벽의 고백>에서는 벽 너머의 존재들을 불러낸다. 여기로 소환된 엄마, 이주민, 히어로는 그간 벽 너머에 존재하던, 당신이 세운 벽에 의해 규정되는 인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과 쓰임의 틈새에서 미끄러지거나 자기식대로 전유한 주체들이다. 육아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반복에서 소진되기를 멈추고 자신의 현재를 드러내며 연대하기 위한 리듬을 발견하거나, 시공간 여기서 저기로의 이동과 정착의 과정을 통해 고정된 삶의 양식과 사회적 인식에 대항하기도 한다. 또한 자아실현의 강박에서 벗어나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긴다. 이들은 일상에 찌들고 사회적 정체성에 종종 회의감을 갖는 당신과 일면 닮아있다. 벽을 가운데 두고 당신과 그들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연결선이 미약하게나마 생기는 순간, 대상화했던 시선을 거두고 그들을 바라보며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취약성에 공감하는 몸짓으로서 말이다.
엄마
육아와 돌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양육자의 돌봄을 받았고 언젠가는 돌봄을 제공할 시기가 도래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사회 안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맘충’, ‘노키즈존’으로 평가절하 되거나 저평가된 처우를 받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과 개인들이 자기 보존을 위해 어떠한 투쟁적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조영주 작가는 본인이 기록한 육아일지를 기반으로 이 노동의 반복적 수행을 시각적 리듬과 사운드로 치환한다. 이는 개인이 소진되기를 멈추고 자기를 드러내며 연대하기 위한 리듬을 되찾는 시도이다. 상대가 아이이든 환자이든 식물이든 간에 그들의 몸과 맞대며 정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돌봄의 현장. 이 영역에서 벌어지는 자기본위와 이타적 행위 사이 양가적 수행의 움직임은 관객에게 신체화되는 경험으로서 전달된다.
이주민
이주민이라고 하면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는가? 전쟁 및 기후난민이나 이주노동자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 유목민이나 디지털 노마드, 여행 유튜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디아스포라”인 시대에 이 개념은 확장된다. 21세기 이주민은 과연 누구일까? 이경미 기획자(프로젝트비아비)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이주민 혐오에 집중한 다학제적 연구를 통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 자’로서 이주민의 정체성과 그들을 타기팅(targeting) 하는 사회적 현상을 포착한다. 박관우 작가는 2052년 이주 사업에 참여한 베타 테스터의 기록 일부를 텍스트 설치로 선보인다. “생물학적 신체를 ‘종료’하고 가상세계에 인간을 업로드하는” 이주 프로젝트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미래의 확장된 이주 개념을 보여준다. 한편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모빌리티의 장소로서 기차역은 이동와 유목을 상징한다. 신선주 작가는 블랙과 화이트, 어둠과 빛이라는 대조되는 두 가지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이 본연의 장소성에서 조형적 공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화면에 구현한다.
히어로
대중매체 속 히어로가 등장하는 신창용의 페인팅은 세계관이 뒤섞이는 멀티버스 프로젝트와 풍경 작업으로 구성된다. 이소룡, 존윅, 스파이더맨, 조커, 닥터 스트레인지에 이르기까지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수많은 히어로들은 고난 끝에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한다. 이들의 삶은 사생활을 희생하며 정의를 구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신창용 작가의 페인팅에서는 이 인물들이 한데 모여 라면을 먹으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저 자연에서 캠핑을 즐기며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비출 뿐이다. 이 낯선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자아실현’의 강박을 발견한다. ‘소확행’의 장면은 평소의 히어로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 열망 하에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의 압박 속에 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벽이나 나쁜 벽 같은 것은 없다.
벽은 언제나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 따라 달리 작용하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1975)
마지막으로 화이트큐브의 흰 벽에 조응하는 이연숙 작가의 설치작품은 개인과 사회, 기억(과거)과 감각(현재) 등이 교차하고 침투하는 경계 공간으로, 벽이라는 장소성 너머의 소통과 연결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제 당신이 세워둔 벽 너머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하얀 벽의 고백 (Voices from the Walls)
<하얀 벽의 고백>은 인식 속에 존재하는 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쉬이 '나(우리)'와 '타인(그들)'을 구분 짓고 자신의 취약성을 그들에게 투영하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잠재우려 합니다.
그리하여 벽 너머의 '그들'은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소비되거나 자본주의 산업 체계 안에서 일종의 노동력으로 치부되는 등 얄팍한 존재가 됩니다.
본 전시에서는 벽 너머의 존재들인 엄마, 이주민, 히어로를 소환합니다. 작품 속에서 이들은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과 쓰임의 틈새에서 미끄러지거나 자기식대로 전유한 주체들입니다.
회화, 퍼포먼스 영상 및 사운드, 설치 작품과 연구 자료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되는 전시는 대상화했던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의 취약성을 위로하는 몸짓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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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이경미 (독립 기획자)
벽은 힘이 아니라 두려움의 상징이다.
벽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 확신이 없음을 보여준다.
- 마사 누스바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 2016)
여기, 벽이 서있다. 수용소의 거대한 담장에서부터 쇼핑몰을 구획하는 단지, 지하철 플랫폼, 일터의 파티션, 화장실 칸, 개인의 방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공간을 분리하고 가치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기 보존을 위해 벽들을 계속 세운다. 물리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인식 속에서도 말이다. 이 벽들은 나(우리)와 타인(그들)을 구분 짓고 자신의 취약성을 벽 너머로 밀어버리는 수단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와의 연결 지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밀어낸 그들은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소비되기도 하고 자본주의 산업 체계 안에서 일종의 노동력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나’와는 달라서 참 다행이다! 벽들은 이렇게 두려움을 내려놓고 안심하도록 만든다.
전시 <하얀 벽의 고백>에서는 벽 너머의 존재들을 불러낸다. 여기로 소환된 엄마, 이주민, 히어로는 그간 벽 너머에 존재하던, 당신이 세운 벽에 의해 규정되는 인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과 쓰임의 틈새에서 미끄러지거나 자기식대로 전유한 주체들이다. 육아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반복에서 소진되기를 멈추고 자신의 현재를 드러내며 연대하기 위한 리듬을 발견하거나, 시공간 여기서 저기로의 이동과 정착의 과정을 통해 고정된 삶의 양식과 사회적 인식에 대항하기도 한다. 또한 자아실현의 강박에서 벗어나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긴다. 이들은 일상에 찌들고 사회적 정체성에 종종 회의감을 갖는 당신과 일면 닮아있다. 벽을 가운데 두고 당신과 그들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연결선이 미약하게나마 생기는 순간, 대상화했던 시선을 거두고 그들을 바라보며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취약성에 공감하는 몸짓으로서 말이다.
엄마
육아와 돌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양육자의 돌봄을 받았고 언젠가는 돌봄을 제공할 시기가 도래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사회 안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맘충’, ‘노키즈존’으로 평가절하 되거나 저평가된 처우를 받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과 개인들이 자기 보존을 위해 어떠한 투쟁적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조영주 작가는 본인이 기록한 육아일지를 기반으로 이 노동의 반복적 수행을 시각적 리듬과 사운드로 치환한다. 이는 개인이 소진되기를 멈추고 자기를 드러내며 연대하기 위한 리듬을 되찾는 시도이다. 상대가 아이이든 환자이든 식물이든 간에 그들의 몸과 맞대며 정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돌봄의 현장. 이 영역에서 벌어지는 자기본위와 이타적 행위 사이 양가적 수행의 움직임은 관객에게 신체화되는 경험으로서 전달된다.
이주민
이주민이라고 하면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는가? 전쟁 및 기후난민이나 이주노동자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 유목민이나 디지털 노마드, 여행 유튜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디아스포라”인 시대에 이 개념은 확장된다. 21세기 이주민은 과연 누구일까? 이경미 기획자(프로젝트비아비)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이주민 혐오에 집중한 다학제적 연구를 통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 자’로서 이주민의 정체성과 그들을 타기팅(targeting) 하는 사회적 현상을 포착한다. 박관우 작가는 2052년 이주 사업에 참여한 베타 테스터의 기록 일부를 텍스트 설치로 선보인다. “생물학적 신체를 ‘종료’하고 가상세계에 인간을 업로드하는” 이주 프로젝트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미래의 확장된 이주 개념을 보여준다. 한편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모빌리티의 장소로서 기차역은 이동와 유목을 상징한다. 신선주 작가는 블랙과 화이트, 어둠과 빛이라는 대조되는 두 가지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이 본연의 장소성에서 조형적 공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화면에 구현한다.
히어로
대중매체 속 히어로가 등장하는 신창용의 페인팅은 세계관이 뒤섞이는 멀티버스 프로젝트와 풍경 작업으로 구성된다. 이소룡, 존윅, 스파이더맨, 조커, 닥터 스트레인지에 이르기까지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수많은 히어로들은 고난 끝에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한다. 이들의 삶은 사생활을 희생하며 정의를 구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신창용 작가의 페인팅에서는 이 인물들이 한데 모여 라면을 먹으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저 자연에서 캠핑을 즐기며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비출 뿐이다. 이 낯선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자아실현’의 강박을 발견한다. ‘소확행’의 장면은 평소의 히어로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 열망 하에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의 압박 속에 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벽이나 나쁜 벽 같은 것은 없다.
벽은 언제나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 따라 달리 작용하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1975)
마지막으로 화이트큐브의 흰 벽에 조응하는 이연숙 작가의 설치작품은 개인과 사회, 기억(과거)과 감각(현재) 등이 교차하고 침투하는 경계 공간으로, 벽이라는 장소성 너머의 소통과 연결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제 당신이 세워둔 벽 너머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